1850년대 말부터 파리 공식 미술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티소는 초기에 다소 고뇌에 찬 문학적 작품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련된 장르적 회화와 초상화로 작품 경향을 전향하면서 빠르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일본 예술로부터 받은 영향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풍자적인 데생 작품들을 영국의 유명 주간지 '배너티 페어'에 자주 수록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영향력 있는 영국 출판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870년대 런던에서 제임스 티소는 한가로이 거니는 연인이나 화려한 드레스 무도회와 같은 여가 장면 및 세련된 사교 행사 장면들을 주로그렸으며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왕립 아카데미에서 정기적으로 전시되어습니다. 제임스 티소는 1870년대 후반부터 판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는 많은 수의 에칭, 드라이포인트, 메조틴트 판화 작품들을 제작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일본금속 세공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칠보법랑을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캐슬린 뉴턴의 사망 이후 1880년대 초에 파리로 돌아온 그의 작업은 당시 여러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 계층의 파리 여성들의 이미지로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파리의 여인들' 시리즈와 '탕아' 시리즈 등이 있습니다. 이후 제임스 티소의 후기 작품활동은 극적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그가 당시 죽은 아내의 영혼을 보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종교적 주제에 전념하였으며 직접 연구를 하기 위해 성지로 수 차례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제임스 티소는 성서적 주제의 삽화 작품을 통해 당시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오늘날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무엇보다도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상류층의 생활 모습을 담은 회화 작품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세련된 여성인물들의 다양한 일상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당대 많은 인기와 성공을 거두었던 그는 19세기 파리 미술계 뿐만 아니라 런던 미술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