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레이번은 당대의 뛰어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고국인 스코틀랜드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예비 스케치 없이 캔버스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으며 명암 표현을 위해 모델을 광원 앞에 배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1822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다음해 스코틀랜드 왕의 초상화가로 임명되었습니다.
1772년에 레이번은 금세공사 밑에서 도제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식 미술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로를 넓히고자 1784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때 그의 꿈은 명확해 졌습니다. 1787년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즈음에 그의 회화 양식은 상당히 발전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크게 남부 지역인 로우랜드와 북부 지역인 하이랜드로 나뉘는데,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삼은 레이번은 이 주요한 두 지역의 고객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의 두 부류의 고객들은 스코틀랜드 계몽 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던 검소한 옷차림의 로우랜드 사람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으로 초상화에 그려지기를 원했던 하이랜드의 주요 인사들이었습니다. 1740년대에는 영국 왕위 계승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출신 '보니 프린스 찰리'의 반란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견제의 차원에서 스코틀랜드의 집안이나 씨족을 상징하는 격자무늬 직물인 '타탄'과 여타 하이랜드 지역의 의상 착용이 금지되었습니다.
레이번의 기법은 매우 독창적이었습니다. 초상 인물은 부분적으로 그늘이 지게 그렸고, 이는 극적인 효과를 낳았습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복잡한 차단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빛을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번의 방법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수많은 고객들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화가들과는 달리, 잉글랜드에 가서 고객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레이번은 1822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1823년에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초상화가로 임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