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미성의 테너로 기억되는 프리츠 분덜리히의 급작스러운 죽음 또한 당시의 음악팬들에게는 지우기 힘든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로부터 '독일인에게서는 결코 들어볼 수 없었던 목소리의 진수'라는 격찬을 받았고,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이 '대체할 수 없는 음성'이라며 상실의 안타까움을 전했던 프리츠 분덜리히. 성악 방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의 한사람인 나이젤 더글러스는 그의 저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오페라계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분덜리히의 때이른 죽음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성악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성악가로서의 경력은 1955년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부르크 오페라에 단역으로 입단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지휘자 페르디난트 라이트너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오페라단이었습니다. 그곳의 오케스트라에는 에바라는 아름다운 하피스트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반한 분덜리히는 호른 전공임을 내세워 오케스트라에 합류해 호른을 불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에바와 사궐 수 있었고 이듬해 결혼했습니다. 그래도 한동안 단역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마술피리의 타미노를 부르기로 한 요제프라는 테너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신 불러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타미노는 분덜리히가 죽는 순간까지 그를
대표한 최고의 배역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