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덜리히의 초기 시절은 어려웠으며 특히 1935년 부친의 사망 이후 그리고 전쟁기간 중에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혹독한 시련기가 끝나고 나이 어린 분덜리히는 지방의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수련의 결과로 좋은 음성을 지녔음이 분명해지자 프라이부르크의 음악원의 오디션에 응시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장인 마르가라테 폰 빈터벨트에 의하여 입학을 허가받고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4년에 오페라 '마술피리'를 통해서 타미노로 성가를 높이고 이로 인해 첫번째 계약을 프라이부르크 국립극장과 맺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거지학생'에서 조역으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듬해인 1955년 좋업을 하고 지휘자 페르디난트 라이트너의 초청을 받아 슈투트가르트의 위델버그 국립극장에 합류하여 타미노로 주역으로서의 첫번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분덜리히는 연주 경력의 꽃을 피우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에도 짧은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슈투트가르트 오페라단과의 의리를 지켰습니다.
1958년 뮌헨과 비엔나에서 처음 연주를 하였고 1959년 찰즈부르크 부활절 음악 축제에서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후기 오페라 '말없는 여인'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짧은 시간 분덜리히는 폭넓은 연주활동을 하였고 곧이어 특별한 사랑을 지닌 테너로서 명성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극장에서는 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명성을 얻었는데 밝게 빛나는 음성 타미노 페란도 타비오 그리고 벨몬테와 같은 역할에서 감성적이지 않은 성격묘사, 솔직하면서도 순도높은 해석은 동료 테너들과 구별되게 하였습니다.